하재영 작가님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작가님이 살았던 곳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담은 에세이이다. 빡독x하노버 나눔에서 이 책을 나눔 하시는 분이 책에서 필사하신 부분을 소개해주셨는데 내 마음을 사로잡은 하나의 문장 때문에 원래 읽으려고 했던 책들을 뒤로하고 바로 읽었다.
집은 우리에게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차분하게 앉아서 지난 집들을 생각해 본다.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내가 기억하는 첫 집이자 가장 오래 산 집이다. 태어나서 이사 한번 안 다니다가 대학 가서 자취를 시작할 때 출가를 했고, 남가좌동 집은 군대 갔을 때 목동으로 이사를 했으니 거의 20년을 산 집이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위 사진과는 달리 럭셔리한 집은 아니었지만 나름 괜찮은 주택이었다. 사실 살면서 크게 불편함 없이 중산층으로 감사하게도 살았는데 가족 분위기는 좋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좋은 추억도 분명 많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안 좋았던 기억만 남는 것이 아쉽다. 지금이라도 좋았던 추억을 쥐어짜 본다.
압지는 골목 입구에 있던 진미 슈퍼에서 거의 매일같이 당시 돈으로 5,000원에서 10,000원어치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 내가 좋아해서 사주셨는지, 계속 사주셔서 좋아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한 달에 과자에만 상당한 금액을 썼다. 외식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던 어린 시절..... 지금이라도 머리 박고 반성하자.
평생의 취미인 축구와 낚시가 이 집에서 살 때 만들어졌다. 걸어서 10-15분 거리에 명지대학교가 있었고, 흙먼지 날리는 곳에서 비만 안 오면 하루 최소 4시간씩은 축구를 했고, 매우 간헐적이지만 낚시 가서 온 가족이 내기하고 라면 먹고, 삼겹살 먹은 추억은 정말 행복하다. 얼음낚시 갔을 때 얼음이 깨져서 내가 빠졌는데 다들 송어 잡느라 혼자 기어 나온 날이 생각난다. 물에 빠진 아들한테 새우 좀 껴달라고 하는 가족들이나, 낚시터 사장님 옷으로 갈아 입고 계속 낚시한 나나..
긍정적인 삶에 대한 자세,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 등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의 대부분은 이 집에서 배웠다. 다만 부모님들은 그들의 가르침과 180도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을 때 혼란스러웠다. 원래는 안 그랬는데 변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아들이라도 다르게 살게 하려고 그렇게 가르치신 것일까?
대전 유성구 궁동
대전에서 대학교를 보내면서 학교 기숙사, 궁동, 탄방동 등에서 집이 아닌 자취방에서 살았는데 대학생활을 하면서 후회 없이 재미있게 보냈다. 이 중 대학교 1학년 때 지금도 친하게 연락하고 지내는 한 친구와 보증금 10만 원에 월세 10만 원인 집을 5:5로 나눠서 들어갔다. 방도 크고, 화장실 따로 있고, 부엌도 있는 말만 들으면 좋은 집을 싸게 구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밖에서 비가 많이 오면 집에 물이 받아지고, 따듯한 물은 간헐적으로 나오고, 벽에 걸어둔 흰 셔츠는 시간이 지나면 누레지는 정말 10만 원짜리 방이었다. 하지만 주인아주머니께서 굉장히 친절했던 기억이 난다. 물에 잠겨서 쓸 수 없는 가스레인지를 교체해주실 수가 없어서 휴대용 버너와 부탄가스 10개 정도를 지원해주셨다. 당연한 것을 했는데 뭐가 친절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서 저자가 겪은 것에 비하면 천사 같다.
이 집에서 한 가지 미스터리 사건이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 내가 밥부터 술까지 쏜 날이었고, 함께 자리를 한 친구들 6명이 이 집에서 같이 잤다. 정확한 기억으로 내 지갑에 1만 원 남기고 집에 들어왔었는데 다음날 보니 빈 지갑이었다. 술에 취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아이들 지갑에 있는 모든 현금이 사라졌다. 정말 신기하게도 지갑이 밖에 꺼내져 있던 것이 아니라 가방 안에 있거나 겉옷 안에 있거나 했는데 6명의 지갑에서 돈이 없어지는 동안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일하게 한 명이 새벽에 인기척이 있었으나 그냥 우리 중 한 명이 화장실 갔다가 들어가거니 했다고 한 것을 제외하면 정말 아무 단서조차 없었다. 물론 당일에 창문이고 현관문이고 활짝 열고 잔 우리 잘못이긴 하다. 나야 1만 원만 잃어버린 것이지만 그중에는 현금으로 아르바이트비를 받은 친구도 있었다.
아마 이 글을 읽은 사람은 '인기척을 봤다고 한 친구'를 의심할 수도 있다. 솔직히 우리도 그랬으니깐. 하지만 증거 없이 친구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이 사건은 넘어갔다.
독일 니더작센주 하노버
우연히 데이팅 앱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나 독일로 오게 되었다. 하노버는 나의 첫 독일 정착지이자 지금도 살고 있는 터전이기에 제2의 고향 같다. 예전에는 제2의 고향이 대전이었는데 이제는 대전보다 하노버에서 더 오래 살면서 하노버가 더 고향 같지만 대전이나 하노버나 약간 비슷한 느낌이 있다. 엄청 큰 도시는 아닌데 있을 껀 다 있고, 시끌벅적한 그런 재미보다는 자연과 함께 안정감 있는 도시 느낌이다.
아내와 처음 살았던 집은 아내가 유학시절부터 지냈던 거실 하나에 작은 방이 있는 아주 작은 집이었다. 결혼식과 함께 독일에서 흔하지 않은 한국식 8층 집으로 이사 갔다. 베란다가 있는 거실 하나, 방 2개짜리 집이었다.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집 면적은 똑같지만 방 2개, 거실 하나 그리고 로망인 화장실 2개인 집이다. 독일에서는 '손님 화장실'이라고 하는데 예전 집에는 그 공간이 창고로 되어 있었는데 이 집은 화장실로 되어 있어서 매력적이다. 게다가 베란다 대신 1층이라 테라스가 있어 딸아이가 신나게 물놀이도 할 수 있고, 공놀이, 모래 놀이 등 안전한 곳에서 마음껏 놀 수 있기에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
8층 집에서 17학번 대학 생활을 보내고,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정규직이 되었다. 점차 좋아지는 집만큼이나 바빠지고 있지만 우리 가족은 더욱 즐겁고 어제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 있어 뿌듯하다. 특히 아무것도 없이 독일로 날아와서 혼자 아등바등 거리는 나를 믿고, 아낌없이 지원해준 아내에게 고맙다.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독일에 있는 아내를 없이 단독으로 찾아갔었다. 아직도 생각나는 것이 장인어른께서 "그럼 자네는 독일 가서 무엇을 할 텐가?"라는 예상했던 질문에 준비한 답변을 했다. 아내가 딱 5년만 먹여 살려주면, 그다음부터는 밥 값하면서 살겠다는 것이 대답의 기본 골자였다. 4년 만에 밥 값을 하게 된 지금 와서 알게 된 이야기지만 아내와 장인어른과 장모님, 심지어 우리 부모님께서도 워낙 어려운 길이기에 응원은 했지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보잘것없는 나를 보잘것 있도록 믿고 기다려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앞으로 어떤 집에서 살게 될지 모르겠다. 다음은 2020년대에 지은 새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팬트하우스처럼 통유리로 된 벽에 언제 다 청소하나 싶을 정도로 넓은 거실, 더 이상 부엌이 좁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양문형 냉장고 2개와 김치냉장고가 들어가도 충분히 넓은 주방, 각 방마다 다른 테마로 그 목적에 맞게 꾸민 개인적인 공간이 있는 그런 집 말이다. 참고로 8층 집은 1970년대, 지금 사는 곳은 1990년대 지어진 집이다. 독일도 집 값이 많이 오르고 있는데 나의 가치가 더 빨리 더 많이 올라서 집 값이 싸게 느껴지는 날을 꿈 꾸며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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