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인 듯 휴가 아닌 휴가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사피엔스의 멸망>을 계획대로 읽지 못했고, 결국 씽큐온 10기 참여자들과 약속을 한 서평 마감일을 훌쩍 지나서 서평을 쓰기 시작한다. 가만, 만약 내가 지키지 못한 것이 서평 마감일이 아니라 핵폐기물 처리 시한이라면? 실제로 핵폐기물 처리 시한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인류를 위해 내가 반드시 했어야 할 일을 제때 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다수의 인류가 멸망하고 남은 후손들은 대대손손 나를 원망할 것이다. 내가 살아남았어도 그 부담을 이겨낼 수 있을까?
<사피엔스의 멸망>은 인류의 참담한 미래와 희망적인 메시지를 동시에 주는 즉, 병 주고 약 주는 아주 얄미운 스타일이다. 주변에 꼭 이런 친구 있지 않나? 하는 말마다 얄미운데 딱히 반박할 수 없는 이야기만 하는 친구. 그런 친구가 나의 절친이면 그나마 낫지만 상대편으로 만나면 어휴,,,,, 그렇다.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느낌이 딱 그랬다. 뭔가 내편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고, 상대편인데 나에게 훈수를 두며 장기를 두는 듯한 느낌. 답답한데 반박은 할 수 없는... 그냥 골치 아팠다.
전례 없는 위험
특히 전례 없는 위험을 이야기할 때 막막하기까지 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보듯 우리가 앞으로도 겪을 재앙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전례가 없었던 사건이 대부분일 것이다. 전례가 없으니 대응이 늦어질 수 밖에 없고, 해결책 또한 쉽게 나오지 않는다. 전례 없는 위험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위험을 바라보는 직관이 아주 작은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의 직관은 기껏해야 불조심 정도일 것이다. 페스트나 스페인 독감, 코로나. 전례없던 일이 생기면 화재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주지만 우리는 무력하다. 제도적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잘 짜인 매뉴얼이 있다면 가능할까? 마스크를 착용하는 아주 간단한 일도 수백수천의 피해자를 보고 나서도 수일이 걸렸는데 이보다 어려운 일을 우리가 매뉴얼대로 할 수 있을까? 그 매뉴얼은 전례가 없어 완벽하지도 않고, 전례 없는 위험을 대응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는 등 현재 우리가 가진 직관이나 제도로 쉽게 해결할 수 없다.
전례 없는 위험의 또 다른 어려움은 실패할 기회가 없다는 점이다. 성장하기 위해서 피드백은 필수 요소이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위험에 대한 대비 능력이 성장하려면 피드백이 필요하다. 하지만 전례 없는 위험은 딱 한번의 기회만을 준다. 마치 예전 "특명 아빠의 도전"처럼 말이다.
"특명 아빠의 도전"은 그래도 연습할 시간이라도 주지, 전례 없는 위험은 가차없다. 인류가 대부분은 시행착오 방식으로 위험에 대처했었는데, 이러한 위험에 대해서는 선제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떻게 선제 조치를 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이 나와 있긴 하지만 추상적이다. 결단력 있는 행동을 할 강력한 기관이 필요하고, 모든 국가의 신속한 조율, 날카로운 판단 능력과 인력, 충분한 예산, 정책 영향력 등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사피엔스의 멸망>과 같은 책을 읽으면서 우리 개개인이 먼저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기관, 능력, 인력 등은 결국 우리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의 부재 또한 전례 없는 위험이 주는 어려움이다. 일어난 적 없는 일을 알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어난 일을 기반으로 지식을 축적했고, 그들을 조합하여 비행기 추락, 원자력 노심 유용 사고 같은 발생 빈도가 낮은 위험을 방지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 반면 소행성 충돌, 핵전쟁 등과 같이 전례 없는 일에 대한 지식의 양은 상당히 적어 어려움을 겪는다.
마지막으로 전례 없는 위험이 주는 어려움은 낮은 확률이다. 아마 시험 전날 벼락치기를 할 때 "선택과 집중"이라는 최고의 변명과 함께 시험에 나올 확률이 높은 범위만 볼 것이다. 시험에 나올 확률이 낮다면 과감하게 버릴 것이다. 웃기겠지만 이런 것이 위험을 대비할 때도 마찬가지다. 빈도가 높은 위험에는 집중하지만 빈도가 낮다면 안일하게 대처를 한다. 하지만 실질적인 확률에 대한 불확실성이 위험을 무시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개인적으로 <사피엔스의 멸망> 최고의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사피엔스의 멸망>을 읽고 나니, 인류 관점이나 기관 또는 정책 관점은 모르겠고, 우선은 사피엔스의 지속성을 위해서 나부터 잘해야겠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사피엔스의 멸망을 막는 가장 최소한의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례가 있는 위험도 제대로 대비 못하면서 전례가 없는 위험을 대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정해져 있는 규칙, 약속을 잘 지키는 것부터 할 줄 알아야 사피엔스의 미래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때로는 사소한 것이 전체를 변화하게 할 수도 있다 하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평 마감일을 지키지 못한 것에 깊은 빡침을 느끼면서도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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