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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드림스] 왜 나는 그렇게 밖에 이야기 하지 못했을까? feat.미안해

서평/2020

by kode_협회장 2020. 12. 27.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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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이라는 단어는 사실 직접적으로 나와 관련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정말 운이 좋게도 살면서 우울한 적도 딱히 없고, 간혹 있던 슬픈 일도 곧잘 극복하곤 했다. 재미있냐, 아니면 더 또는 덜 재미있냐 문제지 고통스럽고, 우울하고 이런 날을 보낸 적이 없는 것 같다. 또는 있었지만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범위를 나에서 조금만 넓히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주변에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약을 복용하고, 상담 및 심리치료 등을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다. <블루 드림스>를 읽는 내내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바빴던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그 어떤 자기 계발서보다 나를 대차게 혼내고 있었기 때문에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심지어 <블루 드림스>는 자기 계발서가 아니다.

<블루 드림스>는 여러 가지 약에 대해서 나온다. 약 자체보다도 그 약을 복용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나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간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던 이들에게 했던 몹쓸 말들이 얼마나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고, 미안했다.

 

블루 드림스 - 약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바꾸는가?

 

미안해

A는 나와 정말 가까운 사이이다. 그는 곧잘 나에게 자신의 우울증 상태나 치료 과정 등을 이야기하는데 병원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항상 불만에 차있었다. (정확하게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처음에는 잘 들어만 주다가 언젠가부터는 별생각 없이 불만이 그렇게 많으니 스스로 우울함을 사는 것이라고 대꾸했다. 의사 탓, 사회 탓, 병원 탓, 부모 탓하지 말고 스스로 극복하라고 했다. 결과물을 만들어 봤냐고, 피드백을 적용해 봤냐고, 책을 읽어 봤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를 이해하려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한 번은 큰 병원에서 뇌 검사, 피검사 등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는데 모두 정상이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본인은 너무 힘들다고 했다. A는 자신은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럽고 힘든데 본인의 이야기를 30초도 듣지 않고 의사는 검사 결과만 이야기했다고 한다. 마치 녹음기처럼... 규칙적으로 운동하라고 하고, 귀신이 보이고, 자꾸 자살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스트레스 때문이니 쉬라고만했다고 한다. 우울한 것 때문에 일을 못하겠는데 일을 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A는 이 의사를 돌팔이라 하면서 엄청 욕했다. 그냥 들어줬어도 되는데 그날도 별생각 없이 "의사가 정상이라는데 왜 네가 환자라고 해? 의사가 전문가지 네가 전문가냐?"라고 했다. 그날 이후 그는 한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뼈가 부러지면 부러진 뼈만 붙이면 된다. 살이 찢어지면 그 살을 꿰매면 된다. 하지만 정신이 찢기고, 마음이 찢기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찢어진 부위를 찾기도 힘들거니와 그 부위만 치료를 할 수도 없다. 이 사실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아도 모른 척했을지도 모른다. 그냥 불평하는 것 같았다. 어리광이라고 까지 생각했다. 내가 '우울'이라는 것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어쩌면 내가 우울한 적이 없다고 한 것은 우울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피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다. A와 했던 지난 카톡 대화들을 다시 읽어보니 이런 나의 말도 안 되는 대꾸에도 스스로 자신의 삶을 움켜쥐고 버텨준 A에게 고마웠다.

 

@pixabay Stefan Keller

 

나도 그들과 같아졌다

A는 자주 눈물로 호소했었다. 우울증 약 때문에 우울한 기분은 줄었지만 구토가 늘어 밥을 먹을 때마다 우울해지니 또 약을 찾고, 그 약은 다시 구토를 유발하는데 그럼 우울함이 전보다 배가 된다고 한다. 이런 약에서 오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데 의사들은 또 다른 약을 처방해주었다. 어떤 약이 A에게 들지 몰라 계속 이런 임상실험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잠들면 일어나지 못할까 무서운데 잠을 자지 못해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처방받는 수면제의 양도 전보다 늘었다고 했다. 공황장애, 트라우마 등 여기에 전부 쓸 수도 없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는 것을 여러 병원의 의사와도 상담하고, 심리치료받고, 약물 치료도 진행했지만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는 사람 자체가 없다고 했다. (다행히 지금 치료받는 곳의 의사는 그들과 다르다고 했다. 상태도 오락가락이지만 아주 조금은 나아졌다고 한다.) 그의 가족 역시 '나도 힘들다.', '네 잘못이니 네가 극복해!', '의사 선생님 말씀 듣고, 딴생각 말고 극복해!'라는 식의 대답뿐이라고 한다.

언젠가 대화 끝에 A는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형, 형한테 미안해.

내가 형한테 말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고 해서 말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나 때문에 형이 그들과 같아진 것 같아 미안해."

몰랐다. A에게 힘내라고 한 말이, 위로해준다고 한 말이, 나의 섣부른 판단과 오만한 생각이 내 소중한 A를 더 힘들게 했다. 그렇게 나도 그를 힘들게 한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었다.

 

@unsplash Logan Weaver

 

선한 영향력

독서를 하고 자기 계발을 하면서 '선한 영향력'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고 말했다. 누군가는 이 단어를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담긴 말이라고 표현했듯이 이 단어는 쉬이 쓸 수 있는 그런 말이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무언가를 배우고 남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받는 사람 기준에서 나의 영향이 과연 선하다고 100%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선한 영향력의 기준은 내가 아닌 받는 사람이다. 따라서 내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서사를 먼저 충분히 듣고 공감하는 것부터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100m 달리기용 신발이라고 생각해 보자. 나보다 큰 발에 신겨졌다면 나와 발 모두에게 좋지 않다. 신발인 내가 찢어질 수도 있고, 주인의 발가락이 다칠 수도 있다. 나보다 훨씬 작은 발은 어떨까? 나의 뛰어난 밑창 고무나, 통풍 기능 등이 발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허벌떡거리다가 넘어질 것이다. 신발과 발이 딱 맞았을 때, 내 기능을 100% 발휘할 수 있고, 그 기능은 주인의 실력과 만나 주인을 100m 챔피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블루 드림스>를 읽으면서 A에게 사과를 했다. 그동안 내가 너를 이해하지 못하고 윽박만 질렀던 것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고맙다고 했고, 우리들은 다시 그가 가진 우울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아마 사과만으로 나에 대한 신뢰가 전부 회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만들어갈 생각이다. A가 나와 이야기 할 때만큼은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 그에게 맞는 신발이 되어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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